하늘과 땅을 갈아엎는다면 이러할까. 푸르른 지평을 뒤섞는 하얀 파고를 멀뚱히 내다보다가, 내부 탐험이 한창인 은결에게 힐끗 시선을 보내었다. 이런 외딴 해안선에 폐성당이 덩그러니 있을 줄은 몰랐는데. 모처럼 둘이서 멀리 나온 당일치기 여행이다. 바다를 구경하러 무작정 운전대를 몰았던 아침까지는 들떠 있었다. 적당히 주차를 하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가로이 산보를 즐기는, 평화롭고 오붓한 데이트였다. 불순물, 그러니까 버려진 신의 집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도 우연이었다.
...저것은 기도일까, 묵념일까. 낡고 먼지 앉은 성모상 앞에서 고개 숙인 연인의 뒷모습에 버들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사복을 입고 나온 여행이었건만, 익숙하고도 정갈한 사제복이 겹쳐 보인 탓이었다. 싫어하는 복장은 아니나, 이 순간만큼은 치기 어린 시기가 불손하게도 불쑥 치고 올라왔기에.
누군가를 위해 안타까워할 줄 아는 상냥함도, 사람을 우선시하는 다정함도, 결국 그를 키워낸 신의 집이 하나의 거름이 되어주었을 거라고, ...받아들이고 있을 텐데. 저를 납득하고 있다 여겼다. 빼앗긴 것이 아니다. 본디 그러했던 반짝임을 제 심연이 집어삼키지 못해 안달 나 있을 뿐이다. 너는 나의 곁만을 따스하게 밝혀줄 촛불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지표가 되어주다 신의 품으로 돌아갈 작은 별이었다. 끼어든 불순물은 되려 자신이라고, 경건의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새로이 깨닫는다. 거대한 순리 앞에서, 제 존재는 어쩌다 걸쳐진 하나의 초라한 귀퉁이였다.
그럼에도 나를 위해 기도하는 작은 손에 그만 착각해버리고, 서툴게나마 애정을 표현하는 순간들에 욕심을 내어버리고 말아서. 저만을 위하던 사소한 순간들이 울컥 그리워져 멀고 아득한 물결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기분이 가라앉은 탓일까. 바라지 않던 허무가 투영된다. 통제되어 있던 삶. 스스로의 욕망을 허락받지 못하면서도, 타인의 필요에 따라 쓰임만을 위해 살아가던 나날. 도구로써 순응하며 살아온, 인간으로서 자격을 포기한 자신.
당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에는 제 과거는 지나치게 얼룩져 있었다. 되뇌면 공허한 울림이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지. 마주하고 있던 바다가 제 머리색을 닮은 연녹빛이라 괜스레 몰두했던 모양이다. 떨쳐내기는 어렵지 않다. 눈 앞에 펼쳐진 바다, 심해는 제 안에도 존재하므로. 망각의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자신을 연상으로 엮어 끌어들인다.
고요한 침잠.
감흥도 의미도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심상이 그저 지독하게 외로이 울어 눈물도 없이 마른 고개를 들었다. 한 번 맛본 온기는 잊히려야 잊히지 않는다. 곁에 두었던 따스함은 적막한 해저에서 하나의 지표가 되어 방향성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수면 너머에서 반짝이는 작은 빛의 이미지. 더럽혀진 저마저도 축복하는, 의지하고 싶어지고 마는, 당신의.
갈무리 끝에 제 염원은 결국 너를 향하고야 말아서 헛웃음이 난다. 자신의 존재가 당신의 천국행에 틀림없이 걸림돌이 되리라 알고 있는데도, 당신의 곁을 갖고 싶어. 터벅터벅, 걸음을 폐성당의 안쪽으로 옮긴다. 널브러진 판자가 밟혀 으스러지는 소리에 놀라 은결이 돌아본다. 날카로운 눈매가 동그랗게 떠진다. 버들은 일부러 누구 하나 홀릴 마냥 달짝지근하게 미소 지으며 이마를 콩, 마주 찧었다. 고개를 기울여 불경하게도 입을 맞추면 얼굴이 발갛게 물든다. 이토록 순수하기에 제 수작질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걸 테지.
그러니 곁에 두었을 때 누구보다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야 했다. 감히 더 어울린다고 주장하는 이가 없도록.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가 되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열쇠에 달린 장식이라면 나 이외의 누구도 대신할 수 없도록. 열쇠의 주인이 아닌 다른 이가 다룬다면 손끝이 단면에 베이고 마는, 방범의 기능이 있다면 더 괜찮지 않을까. 결국 자신의 쓸모를 도구로 재단해버리고 마는 모습을 깨닫고 속으로 혀를 차지만, 그걸로 당신의 곁에 머무를 명분을 납득시킬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존재 의의란 중요하다. 신의 종으로서의 은결을 받아들이고, 제 안에 싹튼 소유욕을 죽이고...일련의 과정에서 재정의한 의의가 키링이라 하더라도.
불순물. 여분의 것. 필요로 하지 않아도 마음에 들일만 한. 마침내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두어줄. 조금만 더 욕심을 내자면, 자주 바라보고 아끼고 사랑해주길 바랄 수 있는 존재. 그 정도라면 나는,
...아?
머릿속을 휘젓던 복잡한 상념이 일순 깨끗해진다. 아, 맞아. 사랑해주길 바라는 건 되었지, 참. 은결과의 관계가 연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버들은 여러 차례 이어가던 버드키스를 멈추고 풋, 혼자 웃음이 터졌다. 워낙에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서. 자신 외에도 사랑을 많이 받는 이였던지라. 위대한 신에게도 사랑을 바치고, 틀림없이 내리사랑을 받고 있을- 자신과는 다른 그대였기에, 그만 또 매몰해버린 모양이었다.
이제 갈까요, 은결 씨.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하는 당신의 손을 잡는다. 나란히 걸으면서도 당신의 곁에 있을 자격에 대해 생각한다. 적어도 신의 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빼앗기지 않을 정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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